국제평화세미나
국가와 전쟁
프랑스 아나키스트 연맹 대표
로이아코노 루시아노
머리말
「국제 아나키스트 연맹(I.F.A.)」에 가입되어 있는 여러 아나키스트 조직 중의 프랑스 아나키스트연맹(F.A.F.)은 평화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이어야 하며 국가의 통제에 반대되는 혁신적인 주제로 평화에 관한 본 세미나에 당연히 협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현 상태로서의 평화는 관념이며 개념일 뿐이다. 현실적 평화는 그것과 상반되는 국가간의 격렬한 갈등인 전쟁에 비교되어서 밖에는 정의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전쟁이란 사실을 국가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국가의 어떤 특권뿐만 아니라 그 토대 원리 및 존속에 이의를 제기하는 근원적인 평화론을 생각하는 것도 아주 논리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전쟁에서 국가의 특별한 역할, 즉 국가주의적 또는 군국주의적 운동의 역할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전쟁을 방지하고 또한 경제질서, 평화의 사회적 보장을 세우기 위한 개인, 집단, 시민사회 등에 의해 행해질 수 있는 것을 직시하기에 앞서 군사적 갈등이 갖는 새로운 동향을 언급하고자 한다.
폭력의 독점
시민 사회에 대해서 국가가 행사하는 지배력을 관리하고 합리화하기 위해서 국가는 갈등을 해소하는 조정자로서 사회생활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 또한 개인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국가는 합법적 폭력의 독점, 관리 및 사용을 확보해 놓고 있다.
합법적으로(국가가 스스로 규정한 정치, 사법, 행정상의 조항 내에서) 폭력을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국가는 지리상으로 통치권의 한계를 결정짓는 국경 안과 국경 밖의 두 가지 방향에서 이를 사용하고 있다. 국경 내에서는 자본주의 사회 및 경제 조직의 규범을 유지하기 위해서, 국경 밖에서는 국가가 그 이익을 지켜주고 있는 자본주의 집단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의 범위를 유지 혹은 확대시키기 위해서이다.
억압적이고 공격적이며 방어적인 이러한 기능을 이행해 나가기 위해서 국가는―국경 내에 대해서는(용납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한계 내에서) 경제, 사회질서의 위반뿐 아니라 정치적 이의도 없도록 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경찰력을 양성하며―국경 밖에 대해서도 우리가 ‘전쟁’이라고 부르는 국민간, 국가간의 직접적인 대결의 무대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군사력을 양성하고 있다.
이러한 전쟁이 사실에 있어서의 정치적, 경제적 갈등을 군사적 영역에 옮겨 나타낸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그 어떤‘인간들이 광란’에 빠져 있을수록 전쟁의 원인은 모든 지배 및 착취의 체계가 갖는 호전적이며 팽창주의적인 경향에서 찾아야 한다.
프루동이 말했듯이 “인간에게 질서를 세운다”는 의도를 가지고 나서서 이내 국민을 반목하는 집단으로 분류해 버린 것은 바로 정부이다. 그 유일한 관심사가 안으로는 예속을 야기시키므로 그 능숙한 솜씨는 실제적으로든 예측적으로든 밖으로 전쟁을 계속하는 데 있었다.
국가적 폭력의 정당화
국가에 의한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이념적인 조절작업을 거치고 있다. 이 작업은 전달 매개체의 전반적인 문화적 억압과 영향력있는 기구의 억압, 현 상태의 관련 홍보 등의 교육체계와 여러 형태의 국가에 대한 봉사로 젊은이들을 직접적, 물리적으로 조절하는 것에 의해 이행되고 있다. 이러한 정신적 중독의 시도는 민주주의에서 복합적이고 종국에 다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국가에 대한 심미적 숭배자이며 동시에 불가사의의 해설자인 국가주의는 개인을 국시에 통합시키고 또한 사회 구성원의 특수 관심사를 국가기간의 관심사와 동일시하고 있다. 이처럼 사회, 경제 및 문화적인 모든 대립은 민족국가라는 도가니 속에서 사회 전체를 용해시키기 위해 부인된다. 그러나 이익집단 및 특수한 인종, 문화적 동일성이란 토대 위에서 내력있는 공동자산에 참여하는 모든 것은 가치가 있다.
누구나 알다시피 국가주의의 활동은 이중적이다. 한 무리의 인간을 전체집단에서 분리하여 이와 동시에 분리된 무리내에서 모든 독창성에 대한 언급을 파괴시킨다. 국가주의는 인정받기 위해서 사회내의 모든 원심적 성향을 축소, 파괴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사회계급 또는 상이하거나 반대되는 경제적 이익 등의 개념은 존속할 수 없으며 지역적 혹은 인종적 동일성이란 개념도 역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물론 국가주의가 전쟁으로 몰아가는 애국주의라는 형태를 항상 취하고 있지는 않다.
국가주의에 대한 현대적 표명은. 국가주의는 바로 민주주의에서 그 근원을, 그리고 지정학적 면에서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체제를 및 가치를 옹호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그 정당성을 찾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프랑스 공화국에 대한 숭배가 역시 인권의 숭배라는 점을 애써 증명하기 위해 국적과 시민권이 혼돈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국가주의와 애국주의가 ‘혁명적 이상’으로 통합되었다. 사회주의에 대한 옹호는 ‘사회당에 대한 옹호’로 옮겨갔으며, 이는 (사회혁명을 이차적으로 제쳐놓고서)사회주의 국가 영역의 전략적 방어를 최우선의 대열에 두도록 한다. 지속적인 위기의 풍토로써 모든 독재적 체제에 적합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사회의 군대화와 ‘예외적인’항구적 상태를 정당화한다.
우습게도 서구에서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자는 민주주의의 기득권을 쉽게 내다 파는 책임없는 자이며 아이들라 호메이니 같은 사람이나 코자크 사람들의 술수에 걸려드는 불안정자로 몰린다. 또 동구에서는 이의를 제기하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자는 사회주의의 기득권을 모르고 있는 자로 간주한다. 그들은 재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는데 계속 자기 주장을 고집한다면 이는 반사회적 요소이며, 잘못된 애국자가 되고 객관적으로 보아서도 제국주의의 앞잡이며 외국의 돈이나 받는 태업자로 취급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결국 산산조각이 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경향으로 볼 때 어떤 국가라도 잠재적 전쟁상태에 있다. 국가주의적 변론은 그 성향으로 보아 편집증으로 확증된다고 할 때 외국에 대해서 공격적인 국가가 내부의 단계에서도 억압적으로 되며, 국가내의 합의를 거부하는 어떤 개인까지도 분명한 앞잡이로 삼아버린다.
군대-범죄를 이끄는 제도
아나키스트들의 입장은 이렇게 요약된다. 즉, 자본주의 국가(혹은 개인이란 모든 형태하의)는 본질적으로 팽창주의적이며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 국가는 전쟁을 준비하고 국가를 운영하고 이끌어 나가기 위해 자본주의에 필요 불가결한 정치적 구조물이다.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지배는 분리될 수 없고 전쟁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국가가 경찰 및 군사 구조물인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즉―군사제도가 직접적으로 시민의 힘에 의존하고 있는 자유사회에서와 같이―혹은 군대에 의해 직접 통치되고 있는 세계의 4분의3이나 되는 나라에서처럼 이는 불가피하다. 이때 국가는 정치, 사회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것까지 관리하는 능력을 펼쳐 보이는 군대라는 조직도 한 가지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지구상에 가장 널리 펴져 있는 후자의 경우 역시 독재가 아니면서 군인에 의해 이끌려 나가는 나라는 없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군대는 사실상 좋게든 나쁘게든 사용될 수 있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자립적 단체임이 확인되어 정치생활에 대한 그 영향력을 동원할 수 있는 범위가 어떠하든지 간에 요지부동인 것이다.
분명 몇 가지 이유로 이를 설명할 수가 있다. 군대는 무엇보다도 집단의 제도적인 폭력을 관리하고, 파괴를 행하는 일을 도맡아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협동조합과 마찬가지로 군대가 역사, 미학 그리고 ‘문화’ 등을 계발하는 고유의 규칙과 원리를 배양하고 있다. 스스로의 가치에 따라 세계를 바라보며 스스로의 조직 양식에 따라 사회를 조직화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또 스스로의 형상에 따른 세계를 열망하기 때문에 군대는 국가 밖과 마찬가지로 국가 안에서도 지속적 위협의 중압을 가한다.
실제적으로 군대의 정치, 사회적인 계획은―즉, 절대적 계급제도, 전적인 굴복과 복종의―전체주의이다. 군대의 소명은 성향으로 봐서 갈등과 전쟁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군의 일차적인 정당성은 안보로서 위기를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는데, 우선 선전으로서 실제에 있어서는 전략적인 공약남발과 파괴의 수단이나 도구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군의 독재라는 것은 예외적인 수단이 아니라 조직의 전형인 것이다. 또한 방법이 아닌 궁극적 목표인 전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핵전쟁에서 지하전쟁에까지
핵의 포화는 대중에게 크나큰 타격을 가하는 극단의 예가 된다.
처음 미국이, 이어서 소련이 원자무기를 독점하고 있을 때, 이 무기를 이용해서 두 나라가 서로의 ‘실력 차이를 견주어 보고’ 싶은 유혹은 대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모든 강대국들이 핵작전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가능한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의 정도와 계시록에 있는 단계적인 확정의 위험성이 매우 높아서 그 누구도 이러한 보편화된 갈등을 개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원자의 포화는 절대적이지만 그 방지책으로서의 최후 무기로 간주되고 있다. 핵 사용 반대전략에 대처하기 위해 핵무기 보유의 제 국가는 결국 자신들의 팽창주의적 음모를 이끌고 나가기 위해 전략을 더 교묘히 꾀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사적 전략은 각색되며 지하전쟁에 집중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강대국의 이와 같은 전술적 변화는 반대로 대규모의 고전적 전쟁을 실행하기 위한 방법이 없는 약소국가의 실제와 부딪치고 있다. 시대적 징후로 이전에는 실전에 부가적이고 보조적이었다고 간주된 게릴라가 이제는 이를 실행하는 세력의 이념이 무엇이든 간에 현대적 분규의 유형이 되었다.
계속되는 게릴라의 소규모 공세는 정면전쟁을 대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함께 국가의 특수업무는 능동적일 수 없으며 공포정치가 흔할 수 없었다. 이는 대리에 의해서, 또 적대관계의 개시를 공식적으로 선포해야 하지 않아도 지상에서 전쟁을 이끌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상호 이해 소통의 시대에 정신과 여론을 정복하는 일은 영토 정복하는 것만큼이나 의의가 있었다. 대중을 조종하는 심리적 무기로서의 공포정치가 비약을 보게 되는 것은 분명 이런 이유 때문이다.
21세기가 시작되는 지금 전쟁은 더 이상 시공간의 제약이 없다. 근대전은 모든 수단을 동원할 뿐만 아니라 무기를 사용하며 확산되고 지속화되었다. 파괴의 대규모적 방법과 맹목적 공포주의의 실제가 모든 중립성과 개별적 평화에 대한 생각을 가로막는다. 이제 전쟁은 단지 군사적인 위치나 대상이 없어졌고 지상에 평화의 성역이란 있지 않게 되었다.
혁명과 평화
군국주의 및 전쟁의 과정을 국가 구성원들이 반대하는 일은 모두가 알다시피 절박한 것이다.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지난 세기까지 아나키스트로서는 그 운동으로 평화적 노력을 결코 아끼지 않았다. 이점에 있어서는 두 가지 개념, 즉 휴머니즘과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성이란 데 기초를 두고 있다. 사실상 휴머니즘은 피부색이나 언어가 다르다 하더라도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법령에 의거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이 국가 위에다 자신의 양심을 두고 자신이 속한 국가보다 전 인류를 택하는 일 등을 가능하게 한다.
노동운동사에서 생겨난 국제적 연대성은 국경을 초월하여 신분 및 이익 집단과 모든 착취자에 대립된 착취당하는 모든 사람들의 투쟁의 연대의식을 내세우고 있다. 실제적으로 활약중인 휴머니즘은 양심적인 의의를 인정받기 위한 노력과 국가 및 그 군대에 대한 봉사의 거부에서 하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국제적 연대성은 특히 조합의 수준과 국제적 상호협력 속에서 반자본주의, 반국가통치주의적 공통전략의 완성에서 나타나야 한다.
반군사주의 및 평화주의를 주변화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 바로 해결해야 할 평화주의자들의 임무는
―국가 구성원들의 소식
―사회, 문화, 조합, 지식, 과학 등의 분야에 대한 첨예화 및 동원
―저항자들에 대한 원조의 조직화 등을 강화하고 증진시키며 또한 교역 및 비정부형태의 국제적 협력을 더욱 현실화시켜야 한다.
결론
국가 통제적, 자본주의적 그리고 전쟁에 관련된 조직들에 대한 고발은 모든 인간 사이의 절대자유 및 평등관계의 설립을 내포하고 있는 사회조직의 인문주의적 개념 확인에 연결되어야 한다.
실제에 있어서 최소한 미래를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에서 사회 구성원을 조직화하고 전쟁에 대항해 국가 구성원을 동원해야 한다고 해서 사회관계의 근본적 변화만이 평화를 보장하는 지속적 질서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국민에 대한 압제와 상호 증오는 서로가 서로를 대립하게 하고, 그 공통의 원인인 정부의 몰락에 의해서 대립관계를 해결함으로써 사라질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으며 이것은 연대적인 분명한 사실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사회혁명을 준비하라
동아시아의 평화주의 전통
동아대학교 교수 유 명 종
머리말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극동 지방의 전통적인 반강제, 반전적인 자유, 평화주의는 어떠한가? 자유와 평등은 인간의 기본요건이다. 따라서 이들 지방에도 이런 것들이 고대로부터 존재하여 왔다.
기원전 2000년경 전설적인 요 임금이 허유에게 국가 지배권을 양보하려고 힜지만 허유는 이를 피해서 도망해 버렸다. 기원전 1000년경에는 은나라 탕왕이 변수와 무광에게 국가권력을 양보하려고 했으나, 변수는 도망해서 동수에서 투신자살하고 무광 역시 노수에서 돌을 가슴에 안고 투신하였다. 또한 기원전 700년경 고죽국의 왕자 백이와 숙제는 국가 계승을 서로 양보하다가 결국 함께 군왕의 자리를 버리고 서주로 망명했다. 그러나 주의 무왕이 은나라와 전쟁을 시작하므로 이를 중지할 것을 권고 하다가 실패하자 수양산으로 은거하여 주나라의 곡식을 거부하고 고사리를 먹다가 굶어죽었다. 이때 이들이 죽어가면서 부른 노래를 사마천의 『사기』「백이열전」에서는 “강폭으로써 강폭을 대신해 그 잘못을 모른다” 라고 소개하고 있다. 허유, 변수, 무광, 백이 모두가 포악한 국가권력을 거부하고 죽음으로 항거하였으며, 또 전쟁을 폭력으로서 폭력을 대신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평화를 희구하였다. 그러므로 맹자는 평하기를 “백이는 군주가 강폭하면 섬기지 않고… 포악한 정부를 거부했다.” 라고 하였으며, 중화민국 초의 아나키스트 장병린(1869~1936)은 백이를 톨스토이에 견주었다. 이러한 반강폭, 반전사상은 공자에게서 볼 수 있고, 특히 묵자의 인류애와 반전평화주의는 철저했다. 모두 ‘어짐으로써 폭력을 대신한다.’ 혹은 ‘인류애로써 폭력을 대신한다’는 것을 이상으로 하였다. 이런 점들이 중국 전통사상에서 보여지고 있다.
유가의 반강권주의와 묵자의 평화주의
공자는 먼저 강권적 지배를 반대하고 “정치는 덕으로 해야 한다” “인민을 지도할 때 정치권력으로 하거나 인민의 질서를 법률형벌로써 한다면 인민이 권력, 법률형벌을 도피해도 수치스러운 줄 모르지만, 인민을 지도할 때 덕으로써 하고 질서를 지킬 때 자율적인 예로써 한다면 수치를 깨닫고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정치는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고 했는데 그가 말한 정치적 정의란 무엇인가?
첫째, 민중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까닭에 공자는 “군단의 장군을 파면할 수 있지만 서민의 자유의지는 박탈할 수 없다”고 하였다.
둘째, 전쟁과 질병을 조심하고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공자가 조심한 것은 제사일과 전쟁과 질병이다” “위나라 영공이 공자에게 전술에 관해 질문하였을 때 공자는 전쟁하는 일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고 대답한 후 다음날 그 나라를 떠나버렸다”고 하였으며, “제자인 자공이 정치는 어떻게 합니까 하였는데, 공자는 식량을 풍족하게 하여 굶어 죽지 않게하고 전쟁방지를 위해서 무기를 풍족케 하며 인민으로부터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하였다. 자공이 부득이 이 셋 중에서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하느냐고 물은즉 공자는 병기를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공자는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삼가야 한다고 했다.
셋째, 공자는 독재적 살인정치를 반대하였다.
“계경자라는 강권주의자가 공자에게 정치에 관해 질문하고 무도한 자를 죽이고 도의길로 나아가도록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공자는 당신이 정치를 하는데 어찌 살인을 말하느냐”하고, “공자는 착한 이가 나라를 백년만 다스린다면 살인정치를 제거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넷째, 정치는 인민으로 하여금 부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공자가 위나라로 가는데 염유가 수행하였다. 공자가 그 나라를 보고 인구가 많구나 하였다. 염유가 이미 인구가 많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인민을 부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나아가서는 인민의 부를 보장하기 위해 먼저 재산의 균등분배를 해야 하고, 다음 세금을 감소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는 국가를 통치하는 자는 국가재원(세금)이 적은 것을 근심하지 않고 인민에게 균등한 재원의 분배가 실현되고 있는지 없는지를 근심할 것이며, 가난을 근심하지 않고 안정되지 못한 것을 근심한다고 하였다. 대개 재산이 균등하다면 빈곤은 소멸된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공자는 인민재산의 균등분배로써 가난을 추방하고 인민의 불안을 해결함으로써 평화가 보장된다고 생각했다.
다섯째, 인민에 대한 수탈을 방지해야 하므로 세금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공자는 그의 제자 염구가 노나라의 강권적 지배자 밑에서 관리가 되어 무거운 세금으로 수탈하여 그 나라 시조 주공보다도 계씨를 부하게 하였으므로 제자들에게 통탄스럽다고 하였으며, 또 공자에게 충실한 제자인 유약이 애공의 관리가 되었는데, 애공이 흉년으로 국가재용이 부족하니 어찌하느냐며 유약에게 물었더니 그는 수확량의 1/10로 세금을 줄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군주 애공은 2/10의 세도 부족한데 어찌 1/10의 세로 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 유약은, 백성이 풍족한데 군주는 누구와 함께 부족할 것이며 백성이 부족하다면 군주는 누구와 함께 풍족할 것인가 라며 국가의 부와 빈곤은 백성의 부와 빈곤으로부터 결정되며 군주의 부가 국가의 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결국 공자는, 인민의 안정과 균등한 재산분배로써 평화가 유지되지만 반대로 포악한 지배자 때문에 혼란이 일어난다고 강제적 지배를 거부하였다.
공자는 정치권력은 본질적으로 포악하고 인민이 자유를 도적하는 성질이 있다고 경계하였다. 세계가 곤궁하다면 하늘이 주는 복도 영원히 바라지 못한다고 하였고, 재용은 절제하고 사람은 사랑한다고 했으니 인간애만이 반강권, 반전으로써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맹자(B.C.385~B.C.304?)는 공자를 계승하여 세계평화와 인간애를 위한 왕도정치를 주장하였다.
“세계의 평화는 부모를 사랑하고 어른을 존경하는 데 있다”고 하여 혈연적 종족 범위를 초월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계를 평화롭게 하고자 한다면 지금 나를 두고 그 누가 있겠는가”라고 한 것을 보면 세계평화를 자기의 사명으로 확신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세계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권력으로써 지배하는 패도를 반대하고 도덕적 인간애(仁)를 실천하는 왕도를 주장하였다. 맹자 가로되 “권력과 무력으로써 어진이로 가장하는 것은 패도요… 도덕으로써 인을 실천하는 것은 왕도이다… 무력, 권력으로써 인간을 복종하게 하면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의 힘이 부족한 것뿐이다. 도덕으로 인간을 복종케 하면 마음속으로 기뻐하니 참된 복종이다”라고 하였다.
패도라는 강권주의와 대립하는 맹자의 도덕적 인간애를 실천하는 왕도주의의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 패도는 무력으로써 위협하는 정치이니 반대하고 군자는 싸우지 않는다고 하였다. 즉 전쟁과 살인적 권력으로 인민을 지배하는 것이 패도라고 하였다. 양나라 양왕이 어떻게 하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지를 묻자 맹자는 천하의 통일은 인심의 안정이라고 했다. 또 누구와 함께 통일할 것인가룰 물으니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통일한다… 만약 살인을 즐기지 않는 군주가 있다면 천하의 인민이 모두 환영할 것이라고 하였다. 맹자가 말한 살인이란 물론 무력, 권력에 의한 것이지만 추위와 빈곤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것도 살인에 포함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에 유감이 없는 것이 왕도의 시작이다” “백성이 주리지 아니하고 추위에 떨지 않게 한다면 왕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하나의 부정의를 행하거나 하나의 무죄한 사람을 살인하고는 천하를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민의 삶을 배반한 전쟁, 애락을 일삼는 군주는 잔악한 사람이니 군주로 대접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혁명을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왕도정치는 인민의 마음이 안정된 기초 위에서 성립된다. “고정된 재산이 없다면 안정될 수 없다”, “안정된 마음이 없으면 모든 악행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죄에 빠지게 한 뒤에 형벌을 가하는 정치는 일부러 인민을 엮어 죽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안정된 재산의 보장은 왕도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하고 세금의 감소와 흉년에 대한 대책과 정전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하나의 지역을 공평하게 구등분으로 나누고 여덟 가구에 여덟 등분을 사유케 하며 나머지는 공유로 하여 국가의 세금으로 내기 위하여 공동으로 경작케 하였다. 이 여덟 가구로 구성된 공동체의 구성원은 서로 우애하고 서로 도우며 질병을 막아내는 데 서로 협조한다. 이와 같이 균등한 토지분배로써 삶의 근거를 확보하고 상부상조케 하는 것은 사유와 공유를 겸한 토지재산 분배라고 하겠다. 공자의 균등경제 논리를 계승한 맹자는 정전제를 주장하였으므로 이것은 맹자 이후 유가의 토지경제 기본방침이 되었다. 이 제도는 균전 등으로 발전하지만 지배관료의 거부로 실시되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조선 중종 때의 인물인 기준의 정전제도 실시의 주장과 황준량(1517~1563)의 균전의, 유형원(1622~1673)의 공전제, 이익(1682~1764)의 균전론, 정약용(1762~1836)의 부락공유제인 여전법 등은 빈부의 격차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맹자의 인간평등관과 관계가 있다. 인간은 평등하게 본성이 선하므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확신과 “하늘이 너에게 재질을 내림이 다르지 않다”는 인간평등관이다.
셋째, 송나라 장구성은『맹자전』에서 “임금의 학문은 근본이 세계와 국가를 위한 까닭에 그 주장은 백성을 주로 한다”고 하여 맹자의 왕도는 ‘민주’라고 하였다.
묵자(B.C.468~B.C.402?)는 시대적으로 공자보다 뒤이며, 맹자보다는 앞의 사람이다. 그는 철저한 반전조직을 결성하고, 춘추시대 말 전국시대 초기, 반전평화를 위해 활동한 인도주의자이다. 그는 혈연적 종족주의를 넘어서 세계적 인간애로부터 출발하였다.
묵자의 ‘겸애 상, 중, 하’ 세 편은 혈연적 종족사회를 넘어서 인류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주장한 것으로써 “어진 사람이 할 일은 세계의 공리를 진흥하고 세계의 해독을 제거하는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다.
묵자는 “지금 국가와 국가가 서로 공격하고 귀족과 귀족이 서로 싸우고 개인과 개인이 서로 해치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에 발생했는가? 그것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까닭에 발생하였다”라고 하였다. 서로 사랑하게 하고 타인을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한다면 평화가 이룩될 것이므로 사람을 사랑하라고 권고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이 국가와 국가가 서로 사랑한다면 혼란은 중지되고 세계는 평화롭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천하의 군자가 모두 비난해서 불의라고 하는데도 지금 타국을 공격하나 불의인 줄 모르고 칭송하며 정의라고 한다. 참으로 그 불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살인자의 말을 기록하고 후세에 남기려고 한다. 만약 불의인 줄 안다면 어찌 불의를 기록하고 후세에 남기겠는가… 이제 작은 죄는 알고 비난하면서 크게 비난받아야 할 전쟁은 비난할 줄 모르고 칭찬하며 정의라고 한다. 어찌 정의와 불의의 차이를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으로 천하의 군자는 정의와 불의의 혼란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까닭에 묵자의 반전 평화주의는 인도주의에 근거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바쿠닌 도척과 예운의 대동주의
도척에 대하여 장자의 「도척편」은 공자의 예교주의를 비난하여, 알하지 않고 먹고 있으며 멋대로 입을 놀려 세계의 군주를 유혹하고, 서생들이 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며 부모에게 효하라 형을 공경하라며 명예와 부귀를 얻고자 한다고 평가하여 “옛날 황제는 치우와 전쟁을 했고 ‘요’ 임금과 ‘순’ 임금은 군신제도를 만들었으며, 탕왕은 주인을 추방했고 무왕은 주를 죽였으므로 강자가 약자를 능멸하고 다수가 소수에게 포악하게 되었다. 탕왕, 무왕 이후는 모두가 강폭한 인간이다. 이제 당신 공자는 문왕, 무왕의 도를 닦고 세계의 여론을 조종하고 교육하고 있다. 훌륭한 옷을 입고 거짓말과 거짓 선으로써 세계의 군주를 홀리고 부귀를 얻고자 하니 당신 같은 도적은 없다”고 하였다.
장병린은 도척을 바쿠닌이라 불렀다. 『장자』의 「도척편」은 전국시대 말기의 저작인데, 한나라 초기의 저술이라고 생각되는『예기』의 「예운편」은 대동주의, 즉 세계평화를 주장하였다. “어진이와 능력있는 자를 뽑아 신의와 화목으로써 일을 처리하므로 자기 부모와 아들만을 사랑하지 않고 모든 부모와 아들을 사랑했으며, 노인에게는 노년을 편안케 하고 장년에게는 직업이 있고 아동은 양육하며 불행한 자들을 보호하며 남자는 직분이 있고 여자는 가정을 가지게 하였다. 재화를 싫어하여 버리고 사유하지 않았으며, 노력은 남에게 기대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하지 아니 하였다. 까닭에 잔꾀가 없고 도적이 없으며, 강폭한 도적이 발생하지 아니했으므로 문을 닫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대동이라고 한다”
‘예기’에서는 이와같이 세계평화 대동주의를 주장하였고 ‘장자’에서는 중국의 이상적인 왕이라 알컫는 우왕, 탕왕, 문왕, 무왕, 주공 때문에 가족주의, 재산의 사유, 전쟁, 예법이 일어나 전란이 지속되는 사회로 타락했다고 비판했다. 대동사회를 이상으로 한 것은 유가가 아니라 노자와 장자의 사상과 관계가 있고 공자의 예교적의 사회의 비판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사상은 위나라 칠현의 주동인물인 원적(210~260)의 『대인선생전』으로 나타났다.
“옛날에는 이해관계 때문에 투쟁하지 아니하고 각각 생명을 서로 지키며 명철한 자가 지혜로써 지배하지 않고 어리석기 때문에 실패하지 아니하였으며, 약한 자는 강자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강한자는 폭력을 사용하지 아니하였다. 대개 군주가 없다면 모든 것이 안정되고 관리가 없다면 일만 가지 일이 평화롭다… 군주제도가 확립되어 포학이 발흥했고 관리제가 설정되어 도적이 발생했다”고 하여 군주제도를 반대하고 무군주제도, 무정부제도를 바랬으며 “모든 죄악은 정부의 포학 때문이고 자유와 평화 안정을 위해서는 정부와 신분주의, 빈부의 차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포박자』의 포경언
갈홍은 A.D. 320년에 포박자(抱朴子)라는 책을 저술했는데.「힐포편」에서 포생의 무정부주의를 논하며 포경언의 주장을 인용했으므로 무정부주의의 대략을 짐작할 수 있다.
중화민국 초기의 아나키스트 유사배(劉師培)(1884~1919)는 장계, 장병린, 전현동 등과 일본에서 혹은 중국에서 아나키즘운동을 전개하며 마르크스주의자와 대결했고, ‘천의보’ ‘충보’ 등을 발간하였으며 오치휘, 이석증, 장정강 등의 아나키스트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신세기’를 발간하여 중국 혁명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유사배(劉師培)는 「포생학술발미」에서 포경언은 실로 무군주주의의 효시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포경언의 주장은 분석하였다.
1. 군권신수설을 타파해야 한다. 군권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 아니고 군주는 민중의 한 사람이니 반드시 존중해야 할 필요는 없다.
2. “대개 강폭자가 약자를 능멸하니 약자는 굴복하였다. 지혜로운 자가 우매한 자를 속이니 우매한 자가 봉사하였다. 정복한 까닭에 군신제가 발행했고, 봉사하였으므로 힘없 는 인민의 자유는 구속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불평등한 제도가 자유를 박탈했다는 것 이다.
3. 포생은 인간성을 배반한 것은 정부권력의 포학성 때문이며, 이로 인해서 전쟁, 재난, 질병이 발생한다고 하여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였다.
4. 군주의 수탈을 배격하였다.
5. 거짓 도덕이 인민의 불행을 가져왔으므로 거짓도덕 이전의 자유를 회복해야 하며, 지배자의 도구인 거짓도덕은 도덕이 아니다.
6. 군주제가 없어야 자유가 보장되고 전쟁이 소멸하며 수탈이 없게 된다.
7. 모든 제도가 지배자를 위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8. 명예, 공리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9. 군대는 군주를 위한 것이고 인민을 능멸하는 도구이다.
10. 군주는 본래 포학하니 군주제를 폐지한다면 학정이 발생하지 않는다.
11. 세계의 죄악은 군주제와 신분제 때문이다.
12. 법치제 때문에 인민의 즐거움은 상실되고, 기아, 중과세, 범죄가 증가하였다.
13. 신분사회의 도덕법률로써 평화로운 정치를 기대할 수 없다.
요약한다면 민중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해야 평화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유사배는 포생의 논리를 수용하여 정부의 권력악용과 전쟁, 법률의 죄악성을 비난하고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적 집산제를 반대했다. 포생은 “법률이 완비되면 도적은 더욱 증가한다”고 함으로써 법률만으로 통치할 수 없음을 주장했다.
맺음말
인간의 자유와 평등 박애를 위하여 중국과 한국의 어진 사람들이 추구하여 온 반강권, 반전쟁, 분배의 불평등, 강자의 포학성 등을 규탄하는 평화주의적 역사를 살펴봤다. 이러한 전통의 회고는 세계대동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전통사상의 재해석 또한 요청된다고 아니할 수 없다. 파쇼 혹은 계급독재 등 어떠한 형태이든 강권적 지배주의는 극동의 전통으로 살펴볼 때 거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프라하의 봄’ 뿐만 아니라 ‘인류의 봄’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정치사상에 대한 성찰
소련과학원 철학분과위원회 부위원장
블라지미르 므쉬베니에라제
Ⅰ
오늘날의 세계에 형성되고 있는 상황은 매우 독특하다. 여러 가지 갈등이 현재화되는 형태는 몹시 복잡하며 또한 다양하다. 이들 갈등이 풀려질 수 있는 방법에 있어서는 그러하며 또한 갈등의 질과 양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사실상 이러한 요소들이 연관되어 있는 한, 위에서 언급한 갈등이란 역사상 그 유래를 찾기가 힘들 것이다. 이는 새로운 질적 상태이다.
새로운 정치적 상황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달성함과 아울러, 특히 모든 수준에서 적절한 결정을 내리는데 필수적인,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상황의 전개를 평상적인 방법으로 고찰하는 것이 이제는 충분치 못하게 되었다. 그같은 고찰은 모든 시대에 언제나 있어 왔었다.
오늘날의 현상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는바, 왜냐하면 기존의 방법들이란 이들 새로운 현상을 분석하는데 더 이상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정치사상이 정치적 실재보다 뒤떨어지고 또한 위기적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견해는 오늘날 아주 평범한 주장이 되고 말았다. “학원에서 발전된 정치학과 대중매체에서 발전된 정치보도 그리고 실천적인 정치가들의 정치적 전문화 등의 모두는 이미 부적절한 것으로 증명되었다”(정치적 행위, 1984, pp.Ⅸ-Ⅹ)라고 썼던 일리노이 대학의 G.Beam과 O.Simpson이 옳았다. 최근의 경우에는 1986년 10월 오타와에서 <정치사상의 위기: 새로운 방향의 모색>이라는 주제로 특별국제토론회의가 열렸었다. 사흘간에 걸친 토론에 100여명의 정치학자가 참여했지만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현대 정치학은 암울하고 깊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또한 원자력 참사라는 실제적 위협을 피하기에 충분히 효율적인 모종의 행동이 취해져야 한다.
만일 이러한 위기의 기본적인 원인이 정치학자들이 설교하는 과학의 객관적 타당성에 있어서 그들 자신의 불신이라면 우리와 같은 핵세대에 있어 새로운 정치사상의 근본적인 전제는 전쟁을 추방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적실성있는 방법론이 요구되는 연구주제이다. 소비에트 공산당(CPSU)의 중앙위원회 서기장인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1986년 1월 15일 언급한 바에 따르면 “요구되는 것은 새롭고 과감한 접근, 신선한 정치의식 그리고 인민의 운명에 대해 책임감을 고양시키는 일이다”(모스크바:노보스티 Novoste 통신사, 1986. p.8)
Ⅱ
풍부한 지적 유산의 정수를 형성하는 모든 과학적 접근법의 가장 탁월한 형태는 이론에 대한 창조적 접근이다. 그것은 삶에 과감하게 개입하는 과학의 영광스런 전통을 담보하는데 있으며 구태의연한 사고양식을 극복하고 지적 지평을 확정함과 아울러 혁신적 사고를 고양하고 과학적 세계관의 발전에 꾸준한 진보를 도모케 하며 또한 독단주의에 대항케 한다.
우리는 우리의 혹성에서 삶을 빠르게 변화시키는 전과정을 목도하고 있다. 과학적, 기술적 전진의 빠른 발전, 민주화 운동의 대중적 성장, 반전, 반핵 그리고 우주의 무장에 반대하는 여러 세력들, 사회진보, 민주화 그리고 인권을 위한 노력들이 그러하다.
또한 여기에 이르러서는 전문가들이 예견했던 매 20개월마다 두배로 신장하고 있는 정보의 폭발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정보의 폭발은 신중한 일반화와 그같은 막대한 정보를 취합, 통합해 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훨씬 앞질러 성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새롭게 나타나는 세계적인 문제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는 모든 국가의 통합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한가지 요소는 핵무기의 출현이다. 핵저장 원료의 증대는 인류를 재난으로 위협하는 핵분쟁으로 결과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맥락에 있어서 모든 형태의 이론적 작업, 그것도 특히 정치사상에 훨씬 더 엄격한 요구가 있어 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형태의 사회의식 가운데에서도 정치학은 전위에 서왔으며 가장 빠른 우선 순위를 지켜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인적이든, 공공적이든 혹은 국제적이든을 막론하고 행위의 모든 영역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국면을 띠고 있다. 그리고 인류역사에 있어 국제 관계 부문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될 필요성이 지금처럼 절실한 적은 없었다.
정치과정과 행정 및 정치학의 제원리를 지배하는 법칙들 그리고 현대 정치사상을 둘러싸고 있는 개념들의 전 영역을 지배하는 법칙들은 현실적 삶이 변화하고 발전함에 따라 상당한 정도로 풍부해지고 또한 수정되고 있다. 그래서 이들 개념에 좀더 체계적인 특징을 부여함으로써(정치사상의) 다양한 범주와 상호의존성사이의 상호작용을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하였다.
세계의 단일성과 다양성에 대한 명제는 오늘날 새로운 방식으로 출현하고 있다. 정치, 사회, 경제체계와 정신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역사적 전통 그리고 현존하는 약 백팔십개국 각각의 독특한 국가적 특징은 특정한 형태와 기능 속에서 분명해지고 있다. 이들의 개개국가는 단기적 목표를 설정, 집행하며 아울러 그 자신의 특정한 방식에 따라 장기적인 발전목표를 전망한다. 거기에는 제한적 원칙들―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에 기반하여 성립하는 다양한 동맹관계와 블럭, 그리고 국가연합(association of states)이 있다. 지금까지 세계는 이보다 더 이질적인 양상을 드러내보인 적이 없었다. 우리시대의 근본적인 갈등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다양하게 상충된 제 이해를 현저한 특징으로 찾을 수 있다. 그밖에도 자본주의 국가와 발전도상국 사이의 갈등, 여러 국가군내의 갈등, 블럭, 동맹 내부의 갈등 등과 같은 다른 많은 모순들이 있다. 정신적―이데올로기적 국면에 있어서 이러한 현상의 발로는 무엇보다도 두가지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적 경향―마르크스, 레닌주의자와 부르조아―간의 투쟁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두가지의 서로 다른 정치사상 사이의 투쟁이다.
동시에, 이는 명백한 범세계적 결속, 국가이익의 상호연계 그리고 상호인정 및 교차승인의 이례적 확산에 의해 더욱 고착화되었다. 문자그대로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현대의 대중매체는 경제교역과 과학 및 기술, 문화, 스포츠의 교류를 촉진시켰고 다기화한 체계들, 예컨데 지역적, 국제적 혹은 국가간의 체계 그리고 노동조합과 여타 조직 및 운동의 연합활동은 모든 국가를 정치적 영역과 시간속에 함께 근접시킴으로써 종래에 민족간에 존재하였던 고립의 모든 흔적들을 일소시켰다.
현대세계에 있어 인민의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이해의 통합에 대한 요구를 조건지으며 다양한 상이점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지평에서 그 단일화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기본적이고 객관적인 요소는 핵무기의 제거를 위한 투쟁이다. 왜냐하면 핵무기의 사용은 전인류를 파괴하는 위협을 하기 때문이다. 이 요소는 국가간의 관계에 새로운 정치적 국면을 부여하였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인류의 치명적인 이해를 통일시킬 수 있는 전진기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속물들의 마음속에서도 각 인종에 대한 귀속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의식속에 생존의 필요성을 자각시켰으며 파괴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우리의 문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일깨웠다. 오늘날 세계에 비축되어 있는 핵무기의 저장원료는 58,000,000,000의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바, 이는 현세계 인류의 열두배를 살해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군비경쟁과 우주의 무장화정책은 가장 사악한 것이다. 이는 군비경쟁이 세계를 핵재난의 언저리로 몰아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군비경쟁 하나만으로도 사회―경제적 진보에 유해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인민대중의 과학적―기술적, 문화적―정신적, 그리고 물질적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하고 있다. 그것은 많은 세계인구를 괴롭히고 있는 문맹, 빈곤, 굶주림 그리고 질병에 대한 투쟁을 방해하고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 R.글로소프는 그의 저서<반전을 주장하며(Resist the War)>에서 정확히 설파하고 있는 바 설사 전쟁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전쟁준비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 인류의 생존기회를 박탈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군비와 전쟁준비에 대한 막대한 지출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급박한 세계문제를 풀어가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 즉, 한편으로는 현대 정치과정상의 발전과 과학적―기술적 혁명의 객관적 도정 및 그로부터 결과하는 새로운 조건들 사이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조건에 적응하는 인간의 능력과 점증하는 진보의 속도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강화되는 불협화음을 야기시키고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특히 발전도상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적응력, 곧 시대의 도전에 효율성으로 대처하는 인간의 능력이 저해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치사상의 새로운 형태에 대한 필요성은 또한 많은 전통적인 형태의 정치사상이 이제 단순히 받아들이기 힘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극도로 위험하기 조차하다는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 2,000년을 훨씬 넘게 회자되어온 고대 로마의 격률, Si vis pacem, para bellum(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구시대적 발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어 인간성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의 격률이 되고 말았다. 만일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평화를 준비해야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성이 진실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평화이고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모든 인민이 공동의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미래가 저절로 성취될 거라는 환상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지금 당장 미래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고 미래를 위해 능동적으로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
Ⅲ
정치학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개념 즉, 내 지식으로 말하면 새로운 정치사상인 그것의 주요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세계를 다양성 속의 통일이라는 개념으로 보아 생존을 위하여 평화롭게 공존해야 하는 국가체계로 간주하는 것이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혹은 다른 어떤 문제도 군사력이나 군사적 위협의 수단으로 풀어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풀어질 수 없는 문제도 하나도 없다.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다양한 국제적 연합체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방법을 촉진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치명적인 문제를 다양한 수준에서 논의할 수 있는 다양한 국제적 접촉 및 회담은 특별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항시 증대되었던 많은 문제들은 거듭된 토론과 협의, 협약 그리고 일반협정의 주제가 되고 있다.
두 번째는 국가들의 상호연계성이 점차 깊어지고 있는 만큼 연계된 국가들의 안전을 담보할 필요성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한 국가의 안전은 다른 국가들의 안전에 종속적임을 완전하고도 포괄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한 국가 혹은 일군의 국가가 부당하게도 대규모적인 군사적 수단을 통하여 그들의 안전을 담보하고자 시도할 때 이는 군비경쟁과 갈등으로 가득찬 상황을 유발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갈등 그리고 어떠한 지역적인 무력충돌도 세계적인 핵전쟁으로 비화될 잠재성이 있다. “재래전쟁”이라는 개념 또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비핵무기도 개선되어 그 파괴력이 핵무기의 파괴력에 견줄만큼 되었다.
세 번째, 우리에게는 개방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개방적인 사고는 정형화된 상황과 그 동태성에 대한 냉정한 평가 및 타협에 대한 진정한 대응력을 갖출 뿐만 아니라 탐구적이고 실재적인 특성과 함께 대안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나타낸다. 나아가 우리는 여러 가지 신화를 유포시키고 유언비어를 날조하는 등 여러 가지 심리적인 전쟁수단에 호소하면서 세계지배를 획책하는 따위의 환상적인 목표설정을 포기하여야 한다. 극도의 급속한 발전률로 특징 지워지는 정치과정과 정체된 사상의 보수적 성향이 합리화되지 못하는 이때에 목표와 수단사이의 명백한 균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숱한 이데올로기가 있다. 이데올로기는 종교적, 무신론적, 그리고 다른 공동체의 이해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급과 사회집단의 이해를 나타낸 이들 이데올로기는 또한 다양한 정치적 행동규범의 기초를 제공한다. 이데올로기와 정치학의 보완관계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모든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이데올로기를 배제시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이것은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실패를 초래한다. 그런데 정치학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위상정립이라든가 문제와 수단, 해결방법의 특정성격에 대한 도외시는 마찬가지로 엄청난 오류로 결과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에 있어 이데올로기적 투쟁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렇지만 파렴치한 심리전적 방법에 호소하지 않고 이데올로기적 수단의 도움만으로 그 투쟁은 수행되어야 한다.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맥락에 있어 정치적 수단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코자 고안된 합리적인 정치적 타협은 충분히 수용 가능한 것이고 필요한 것이기 조차 하다. 그런데 군비를 등에 업고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문제를 풀려고 하는 시도는 절대적으로 불필요하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목표와 수단이 그같은 방식으로 대체되었더라면 이는 모든 문명의 파괴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사상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엄격한 접근 그리고 또한 책임의식을 첨가하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네 번째는 현대의 사회―정치적 진보에 있어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던 대중민주주의 운동,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자유권과 청원권을 향유하려는 인민의 요구에 부응하는 역량, 수십만 대중의 운명, 곧 그들의 현재와 미래에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여줄 필요 등과 같은 인민의 절실한 이해와 그들의 감정에 대한 절절한 고려이다.
이것이 대중운동의 출현을 좌우하였던 객관적 조건이었다. 그들은 결코 편견에 사로잡혔던 몇몇 정치가들이 주장했듯이 “공산주의 선동가들의 사악한 음모”가 결과한 산물이 아니었다. 두명의 미국인 정치학자 단.님모와 J 제임스콤스이 그들의 저서<정치현실의 중재(Mediated Political Realities)> (1983 p.202)에서 언급한 것은 다소 전형적이라 할 것이다.
존·버치 협회(John Birch Society)의 창립자인 로버트 웰쉬가 “미국의 60 내지 80%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1973년에 언급했던 바를 인용하여 두 저자는 다음과 같은 실소를 금치못할 문장을 써 내렸다. “모든 주요정책의 혁신―의료보험, 실업보험, 보건행정, 환경보호 등―은 사실상 정부의 통제력을 확대하고 모든 음모적 목표를 확대시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베트남전쟁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자의 발전을 돕기 위해 수행되었다. 그리고 물론, 사회변화에 대한 모든 욕구 (예컨대 인권)와 모든 대중적 유행(예컨대 록큰롤 대중음악)은 질서와 도덕을 혼란시키기 위한 공산주의자의 고무책이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는 악마적 저주와 역사적 사명을 띤 음모자적 편재성, 그리고 모든 사건과 제도와 지도자를 조종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운동이라 할 것이다”
대중 민주주의 운동은 현대적 시점에 있어 강력한 정치적 요소이다. 그것은 핵과 우주시대에 있어 억압적 정책에 대항하는 대중의 법률적 책임이다. 이 운동은 군비경쟁에 종지부를 찍고 핵실험을 포기하며 우주를 무장시키려는 여러 계획의 포기를 요구하고 있다. 반전운동 참여자들 중에는 서방의 선전가들에 의해 오도되어 미국과 소련이 세계긴장에 대해 “동등한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물론, 이는 잘못된 것이다.
비록 대중운동이 공산주의적 슬로건을 내세우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지원하고 동조를 표명하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군이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이상이 평화와 자유와 복지를 희구하는 인간성의 욕구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대중 민주주의 운동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정치체계, 정치사상 그리고 정치적 행위의 민주적 성격을 가늠하는 시금석이다.
다섯 번째는 상호연관된 여러 현상의 연계고리에 있어 그 주된 연계를 파악하는 능력 곧 제1차적 요소를 제2차적 요소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 이 연계는 무기경쟁을 종식시키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를 전염병처럼 휩쓸었던 무기경쟁은 물질적, 지적 자산의 불평등한 배분을 초래하고 이 자산의 군사적 수요에의 낭비를 유발시킨 주요하고도 궁극적인 원인이다(대신에 인본적인 목적을 위해 쓰여졌어야만 했는데).
어떤 전문가의 추산을 보면 1987년에 전세계의 군사비 지출이 930,000,000,000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동시에 세계에 있는 성인 중 세명에 한명꼴로 문맹이고 네 사람에 한명꼴로 영양실조 때문에 고통받고 있으며 매일 수십만의 사람들이 의료혜택을 못받아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의 세계에 있어 군인은 주민 43명에 한명꼴이고 의사는 주민 1,030명에 한명꼴이다. 1960년에 비교해볼 때, 발전도상국의 군비지출은 다섯배가 늘었다.
여섯 번째는 인간적인 추론으로서, 말하자면 타인의 이해를 나의 그것처럼, 같은 집(지구)에 사는 동거인의 그것처럼 이해하는 능력이다. 곧 그의 삶과 복지에 대해 책임을 느낄줄 아는 능력이다. 만일 군비경쟁이 종식된다면 축적된 군사비가 모든 사람의 복지를 위해 쓰여지고 저개발국에 대한 원조기금으로 쓰여질까? 이에 대해 보증할 수 있을까? 이같이 광범위한 성격의 사고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국제관계의 급진적인 민주화, 고도로 인본주의적인 정책의 추구,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 요청된다. 또한 편협하고 파벌적인 이기주의를 뿌리뽑고 신세계주의 정책을 포기하며 근로인민의 광범한 대중적 이익에 기초하여 행동할 것이 요청되어진다.
요즈음의 정치사상은 인종주의 및 인종차별 그리고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의 모든 표명성명을 비난하는 쪽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인민은 평화와 선린의 정신아래 교육되어야 한다. 모든 대중매체와 통신체계 그리고 교육체계는 이러한 측면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심리전 따위는 타민족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을 조장하는 정치적 선전과 함께 폐기되어야 한다.
일곱 번째는 국제문제의 영역에서 경쟁적 관계를 조장하는 일체의 정치사상이 포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같은 사상은 국제관계에 있어 주요한 열쇠로 간주되는 정치적 신뢰를 확립하는데 주된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서구적인 생활양식은 우선 경쟁자를 약화시키고 쇠진시켜 결국은 교살시키는 무자비한 경제적, 정치적 경쟁을 매우 자주 드러내고 있다. 그같은 경제적, 정치적 행동은 궁극적으로는 사유재산제적 의식을 창출해내는 사유재산제도에 기초하고 있다. 그같은 사상 및 행동양식을 대외정책부문, 그것도 특히 다른나라와의 관계에 기계적으로 적용하게 될 때 평화운동에 참혹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같은 사상은 위험스러운 핵경쟁 및 핵분쟁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위에서 언급한 제 원리를 협동과 상호원조, 우정 따위의 미명아래 폐기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물론, 구습에 젖은 정치가들이 세계에 구축한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상실하고도 만족해 한다든지, 오랜 구습을 포기한다든지, 습관적이고 전형적인 사고를 버린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적 상황을 과감하고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것 또한 쉽지 않다. 그렇지만 다른 대안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핵무기의 등장은 국제관계의 성격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현재 개방되어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란 평화공존이며 대항정책과 경쟁의 포기일 뿐이다.
불행하게도 정치적 지혜는 매우 완만하게 발전한다. 정치사상은 종종 정치현실의 증대된 발전에 뒤진다. 지금 진행중인 과정이기는 하지만 한가지 전제는 이성을 넘어 만연하고 있는 무분별함을 예방하고 모험주의가 세계의 안전을 보장하는, 신중하게 계산되고 사려깊은 행동을 억누르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것이다.
현재의 국제관계는 모든 범위의 문제들-경제, 정치, 외교, 과학-기술, 무역, 문화 그리고 심지어는 스포츠에 이르기까지-을 포괄하고 있다. 대외정책의 영역은 다양한 수준의 대화를 포함하는 바, 예컨대 제고된 신뢰도를 측정하려는 노력과 갈등이 내포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따위를 포괄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대외정책은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같은 갈등상황을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호간 수용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고 또 찾는 것을 포함하여야 한다. 국제적 협동과 긴장완화의 추구가 더욱 바람직한 것이다.
극도의 대립이 수수께끼처럼 얽혀있는 현재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합리적이고 수용가능한 방법은 상이한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체계를 가진 제 국가들의 평화공존이다. 이는 단지 전쟁이 전무하다는 것만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이러할 때 국제질서는 군사력보다 선린정책 및 협동아래 재편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문화적 가치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성취업적이 모든 국가의 선을 위하여 광범위하게 교류될 것이다.
철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사회발전을 포함하는 모든 발전은 대립의 극복이나 해결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립에의 사회과학적 접근은 현상과 과정, 그 복잡하고 대립적인 성격의 내적 본질을 밝혀준다. 전적으로 존재의 객관적 법칙에 충실한다면, 그것은 이들 과정에 고유한 내적 대립으로 작용하는 핵심적 역할을 적절히 설명하면서 문제해결의 방법을 제시한다. 이에 덧붙여, 투쟁하는 대립물을 단순히 제거하는 방법만으로 갈등을 해소하려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헤겔이 “획득을 통한 제거”라고 이야기 했듯이 모든 “부동의 단정”(不同의 斷定)은 대립물이 각기 담보하고 있는 긍정적 특성을 획득함으로써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사회적-정치적 관계영역에 적용될 때, 특히 두 세계체제 사이의 갈등에 적용될 때 앞에서 언급한 접근은 외부로부터의 혁명의 수출과 혁명의 후원이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는 또한 반혁명의 수출과 다른 민족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권리와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Ⅳ
평화공존의 원칙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실재적 갈등이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한 우위성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두 체제 사이의 역사적 경쟁과정 때문이며 이것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공존의 원칙에 입각한 올바른 국제정책을 특징짓는 주요한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전쟁의 포기와 분쟁의 해결수단으로서의 무력의 사용 혹은 위협의 포기 및 협상의 강조.
2. 내정불간섭과 상대방의 정당한 이익을 존중
3. 자신들의 운명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인민의 권리
4. 주권 및 국가의 영토적 통합에 대한 존중과 국경선의 불침범
5. 완전한 평등과 상호이익에 기초한 협동
6.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원칙과 국제법적 규범 및 확정된 국제조약에 근거하여 발생된 위임의 성실한 이행
전쟁과 평화의 문제 및 핵재난의 예방필요성은 다양한 과학분야를 논의했던 세계회의의 주제였다. 과학자들이 개최하였던 국제적인 토론회는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지적 분위기와 아이디어를 제공하였으며 과학자들과 문화사업 종사자들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태도를 변모시킬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들 회의는 각국 정부에 핵무기의 사용을 금지할 것과 군비경쟁 및 힘의 우위정책을 포기할 것을 호소하고 분쟁상황의 정치적 해결원칙을 채택하도록 결의하였다. 혹자는 지난 이십년간 과학의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정치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단 한 차례의 국제회의도 없었다고 안일하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또 사람에 따라서는 그같은 과학은 극도로 정치화된 것이며 따라서 경직된 것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1983년 8월 카나다의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17차 세계 철학자 회의는 그러한 점에서 전형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비록 회의의 주요 주제는 철학과 문학이었지만 총회와 분과회의에 제출된 논문가운데 현대의 국제관계에서 배태되는 정치적 문제를 다루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1985년 7월 파리에서 열린 제13차 세계 정치학자 총회는 이런 관점에서 훨씬 의미심장하다. 본회의 참석자들은 군비경쟁과 우주를 무장하려는 시도들 및 우주전략개발을 격렬하게 성토하였다. 향후 몇 년간에 열리게 될 국제회의의 주제는 오늘날의 국제관계라는 맥락에서 인간에게 닥칠 문제들과 그리고 핵세대에 있어 인류의 운명이라는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게 되리라는 것을 주지하고자 한다.
정치학의 영역에서 현대 인간의 위상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다차위적이고 다양한 상호작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상호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정치체계의 기능이라는 시각에서 정치적 의식을 형성하고 행위를 규제하는 메카니즘을 밝혀내는 일이 중요하다. 또한 이데올로기라든가 정치학, 철학(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조건짓는데) 등의 정신적 현상사이에 발생하는 상호관계를 검토하고 보편적인 문화적, 정치적 이상과 가치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정치학을 분석하는 일이 중요하다.
정치적 관계란 사회적 관계를 총체적으로 통합하는 유기적 구성요소이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물질적 생산양식에 의해 결정되며 무엇보다도 경제체계와 같은 사회의 토대에 의해 결정된다. 정치적 관계가 독립된 개체로서 분리될 때 사회적 관계는 복잡하고 상호작용하는 일련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법률적, 도덕적, 종교-교권적 그리고 여타 세력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다른 차원에서 살펴보자면, 정치적 관계는 정신적 생산과정, 특히 다양한 형태의 사회의식(정치적, 법률적, 윤리적, 예술-미학적, 종교적 등)을 정형화시키고 발전시키는 제 과정을 결정짓는 요소로서 작용한다.
이성과 의식을 타고난 피조물로서 인간은 여러 가지 형태의 행위(생산이라든가 이론적 고찰 따위의)를 생각해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참여자임을 자각한다. 행위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과학적 그리고 기술적 진보 뿐만 아니라 그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고양시키는 목적적 과정에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가능성이 언제나 현실 속에 투영되는 것이 아님은 사실이지만 이(행위에 대한 필요성)는 언제나 자각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완전하게 자각되는 것도 아닌 까닭이다. 이것은 한사회에 주도적인 경제적 정치적 조건에 의존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칼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자신의 물질적 산업성에 조응하여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은 또한 그 사회적 관계에 조응하는 원칙과 사상과 계급을 형성한다.”(K.Marx and F. Engles, collected Words, 제6권 p.165)
의식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물질적 생산에서 추론하는 것은 틀린 일이 될지 모른다. 관점과 사상 그리고 이론의 형성에 미치는 물질적 생산의 효과는 사회적 관계(정치적 관계를 포함하는)에 의해 간접적으로 결정된다. 이는 역으로 정신적 생산의 전과정을 규정한다. 바꿔 말하자면 현실세계는 다음의 두 단계, 두 차원의 종속관계를 나타낸다; 물질적 생산-사회적 관계-의식의 형태, 그래서 물질적 생산과정은 궁극적으로 사상의 창출을 결정짓는 요소로서 작용할 뿐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사상의 역할, 특히 정치사상의 역할과 대중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심대하게 증가되었다. 처절한 사상투쟁에 있어 이러한 주변요소는 특별히 엄청난 중요성을 획득한 바, 이 주변요소가 진보적이든 반동적이든 사상은 때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 생산과정은 경제적 토대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은 모든 형태의 사회적 의식, 말하자면 철학, 정치학, 법률, 과학, 종교, 예술 그리고 도덕의 상호작용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에 의존할 때 주어진 사회적 계급구조는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고 그 이익이 역사발전의 법칙에 합당할 때 이데올로기는 진보적일 수 있고 합당하지 않을 때 반동적이 될 것이다.
두 사회체계의 경쟁에 있어 사상투쟁을 오직 이데올로기적 국면에 한정시키고 오직 이데올로기적 수단만으로 투쟁해야될 필요성이 지금처럼 절실한 적은 없었다. 그 목적은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국면에 대치되는 것을 막음으로써 인류의 역사적 발전 전망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함이다. 만일 하나의 정책이 광범한 인민대중의 치명적 이해를 표출하고 또 고양시킨다면 그것은 정치사상 및 행위의 건전한 비판준칙에 기초하며 굳건한 사회-정치적 낙관론을 형성하는데 기여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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