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아나키즘 시론 박정희



자아성찰, 끝없는 회한 -류외향의 시세계 『푸른 손들의 꽃밭 』(2007 )

 







자아성찰, 끝없는 회한 -류외향의 시세계 『푸른 손들의 꽃밭 』(2007 )



 박정희(朴貞熙)



류외향은 그의 시집 『푸른 손들의 꽃밭』에서 스스로 끊임없이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아의 내면이 투사된 대상을 통해 시로써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버려진 구두이기도 하고, 폐 철로이기도 하며, 집 없는 민달팽이이기도 하다. 존재하지만 현실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없는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선에 있는 사물에서 시인은 자신의 내면을 객체화시키고 있다. 그로 인해 자칫 관념으로 치우칠 수도 있는 시들이 구체적인 시어를 만나면서 긴장감과 탄력을 얻게 되었다. 「소래포구」, 「구두 무덤」, 「내개 온 민달팽이」를 통하여 류외향의 시세계를 살펴본다.

 

류외향의 미덕은 바라보는 대상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조금은 안쓰럽게 그리면서 회한의 정서를 드러내 보이는데 있다. 이는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이고 반성이기도 하다. 포구의 끄트머리에서 서성이는 해를 바라보며(「소래포구」), 변두리 어느 골목길을 거니는 자신의 한 생을 떠올리는 지도 모른다.

 

해는 무엇에다 붉은 빛을 다 줘버린 채

포구의 끄트머리에서 서성였고

아무것도 그립지 않은 날들이 허공을 흘러내렸다

그 어디든 마음 밖은 낯설고 두려웠으니 이제껏

발이 빠지지 않을 만큼만 구멍이 뚫린

폐철로의 바닥을 걸어온 것이었다

 

철로는 열차를 기억하지 않고

바다는 염전을 기억하지 않고

갈매기는 바다를 날지 않으니

저들에게 훔친 마음을

송두리째 들켜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묵은 것은 돌아보지 말아야 했던 것이었다

-「소래포구」 일부

 

시인은 협궤열차가 달리던 철로 위에 서 있다. 소래포구 그 철로에서 내려오려니 마음에 수북이 쌓여있던 돌무더기들이 만조의 바다 위로 떨어진다고 하였다. 지금 그 협궤열차는 오래전에 사라져 기적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철로는 열차를 기억하지 않는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열차를 기억하다가 기어이 자신의 마음을 들켜버렸다. 철로와 염전과 갈매기 등 협궤열차를 아는 모든 것들에게.

 

시인의 회한은 “묵은 것은 돌아보지 말아야 했”는데 돌아봄으로써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묵은 것들을 돌아보지 않으려 했는데 시인은 또 낡은 구두 한 켤레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말았다. 그리고는“구두 무덤”을 만들어주어야 하는 의무감을 느낀다.

 

들판에서 구두 한 켤레 보았네

억새풀 사이에서 길 잃은 구두였다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었는지

구두는 조금 머뭇거렸네

오른쪽 구두가 왼쪽 구두보다

발가락 길이만큼 튀어나와 있었네

 

...(중략)....

 

구두코가 가리키는 방향을 쫒다가

문득 그곳까지 구두를 신고 온 이가

들판 속으로 뛰었을 거라 생각했네

들판에서 익사했을 거라 생각했네

 

구두 한 켤레에 가만히 흙 덮어주었네

이 빈 들의 성긴 햇살 한 줌과 까칠한 바람 한 자락도

함께 묻혔네

- 「구두 무덤」 일부

 

시인은 억새풀 사이에 버려진 구두 한 짝을 보았다. 분명 누군가 필요 없어서 아무렇게나 버린 구두였겠지만 작자는 버려진 구두 길이가 다름을 주목했다. 어쩌면 그것은 노력했으나 결과가 신통치 않은 삶의 무게를 설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한 구두에게 다가가 흙을 덮어주고 헤진 구두코에 “햇살 한 줌과 까칠한 바람”까지 넣어준 것은 시인의 자기 연민과 성찰이었다. 빈들에 서 있는 삶의 한자락을 시인은 버려진 구두를 통해 부여잡고 있다.

 

그런 시인은 가슴이 답답해져 바다를 보러 같을 것이다. 확 트인 바다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집으로 돌아온 시인에게 살아있음의 경이를 민달팽이가 알려주었다. 자신에게로 달라붙은 집 없는 달팽이는 결국 시인의 분신이고 시인은 그 분신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시인이 깜깜절벽을 걸어 바다 가까이에 데려다 준 달팽이(「내게 온 민달팽이」)는 시인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했을 것이다.

 

바다를 보러 가 오래 바위에 앉아 있다 온 날

내 엉덩이께 붙어 온 민달팽이

몇 시간을 바지 자락에 붙어 있다가

변기 뚜껑 위로 떨어졌다

 

...중략.....

 

숨이 턱에 차는 떨림이 내 몸으로 파동쳐 왔다

깎아지른 낭떠러지라도 붙어 기어가는 것이 운명일 테지만

상처도 고통도 없는 세숫대야 절벽을

온몸으로 움켜쥐고 도는 민달팽이

건드리면 산산이 찢어질 것 같은 저릿함이 내게로 건너왔다

 

내 바지 자락 붙들고 하염없이 견딘 민달팽이

잘못 찾은 길이지만 기다려줘서 고마워

인가도 인적도 없는

내 마음 속 캄캄절벽을 걸어

바다 가까이 데려다 주었다

 

-「내개 온 민달팽이」 일부

 

바다를 보러 나갔던 시인의 바지에 민달팽이가 달라붙어 왔던 상황에서, 작자는 느리고 느린 달팽이의 걸음을 관찰하고 있다. 고통을 감내하며 하염없이 견디는 집 없는 달팽이의 모습에서 그는 존재에 대한 구원을 떠올렸다. “내 마음 속 캄캄절벽을 걸어”, 즉 스스로의 삶도 버겁지만 타자와 사물, 나아가 주변에 대한 애틋한 관심이다. 우리의 삶은 이 달팽이를 통해 산산이 찢어질 것 같은 저릿함으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달팽이의 느리면서도 기약 없는 걸음걸음에 응원의 박수를 치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우리들 모두가 스스로에게 치는 안타까운 회한과 자기 연민의 모습이다. 시인은 민달팽이가 우리의 자화상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류외향의 시에는 관념의 과잉이 곳곳에 꽈리를 틀고 있다 (「난생을 만나다」, 「겨울, 섬과 잠들다」). 한편 시인의 세상에 대한 해석은 1980년대 민족해방운동, 특히 NL주사 진영의 사고에 머물러 있기도 하다(「2006년 봄, 대추리」, 「매향」). 당대 모순에 대한 진지함은 시인의 책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 더 깊이 있고 진지한 관찰과 고민이 전제되어야 하며, 아울러 시적인 감성과 표현으로 육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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