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희와 전한촌의 공통점에 대하여-전한촌이 이윤희의 또 다른 필명이라고 판단하는 근거
‘전한촌(全寒村)’은 시집 ‘무궤열차’를 1934년 8월 1일 동경에서 간행하였다. (박태일, 『한국 지역문학 연구』, 소명출판, 2019, 1157쪽, 1162쪽, 1167쪽.) 시집 ‘무궤열차’의 저자인 아나키스트 전한촌은, 지금까지 학계나 아나키즘운동 진영에서조차 그의 실체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조선무정부주의운동사 편찬위원회,『한국아나키즘운동사[전편]』, 형설출판사, 1994(2쇄), 406쪽, 423쪽; 김명섭,『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일본에서의 투쟁』,이학사, 2008, 376쪽.) 그러나 김영천 한국자주인연맹 의장은 2018년 9월 10일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태일 교수와의 왕복 이메일에서, 전한촌과 이윤희가 동일 인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윤희의 이력과 전한촌의 활동 사항을 이으면 한 인물의 종합적인 생애가 조명된다. 즉 그는 전한촌이 이윤희의 또 다른 필명이라고 판단하는데, 제시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이윤희와 전한촌은 여타 아나키스트보다도, 노동운동 외에 특별히 농민 및 농촌청년운동까지 전개한 점에서 공통된다.
2. 이윤희와 전한촌은 높은 수준의 에스페란티스트로서 공통점이 있다. 아나키스트의 에스페란토어 습득이 특이한 사항은 아니지만, 이윤희는 당대 최고 수준의 에스페란토어를 구사했으며 전한촌은 시집의 제목에 에스페란토어를 기입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이전,「유림 선생의 일상적인 위풍」,『아나키즘 학술대회, 단주 유림의 사상과 독립노농당』,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2005, 189쪽; 박태일,『한국 지역문학 연구』, 소명출판, 2019, 1157쪽.)
3. 이윤희의 소설 및 팜플렛 발간 시기와 전한촌의 시 및 팜플렛 발간 시기가 비슷하다.
이윤희의 검거, 투옥으로 출판에 지장이 있었기 때문에 ‘이 네스토르’나 ‘전한촌’으로 별개의 필명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이윤희가 ‘이 네스토르’라는 필명을 사용했음은 이미 알려져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결정문」, 2007, 10쪽.)
4. 러시아 농민운동의 지도자 ‘네스토르 마흐노’ 와 ‘全寒村’이라는 춥고 궁벽한 촌락의 이미지는, ‘농촌’과 ‘농민’이라는 의미로 연결된다.
5. 1932년 9월 농촌청년사를 청산하여 재출발하자는 성명문 초안을 이윤희가 기안하였으며(김명섭,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일본에서의 투쟁』,이학사, 2008, 209쪽.), 전한촌은 1933년 9월 창간하여 이듬 해 7호까지 간행한 ‘토민’에서 농촌청년사와 농촌청년운동을 지지한다는 글을 발표했다.(조선무정부주의운동사 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전편〕』, 형설출판사, 1994(2쇄), 423쪽; 김명섭,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일본에서의 투쟁』,이학사, 2008, 192쪽.) 비슷한 시기에 농촌청년사와 농촌청년운동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아나키스트는 이윤희와 전한촌이다.
6. 이윤희와 전한촌은 양일동(梁一東)과 밀접한 연계가 있다. 조선자유노동자조합의 이윤희는 1932년 노동절대회 준비위원회에서 조선동흥노동동맹의 양일동과 더불어 활동했고(김명섭,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일본에서의 투쟁』,이학사, 2008, 215쪽.), 해방 후에도 이들은 독립노농당의 창당에 깊이 관여하여, 각각 독립노농당 충남 대전대덕연합당부 지구당 위원장과 중앙당 선전부장을 맡았다.(김영천,「단주 유림과 독립노농당」,『아나키즘 학술대회, 단주 유림의 사상과 독립노농당』,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2005, 58쪽, 118쪽,120쪽, 122쪽.) 또한 전한촌이 일경에게 피습 검거되고 원고도 압수당한 상태에서, 양일동은 그를 대신하여 이곳저곳에서 불완전하나마 원고를 모아 교정을 보고 시집 ‘무궤열차’를 간행하였다.(박태일, 『한국 지역문학 연구』, 소명출판, 2019, 1159쪽, 1160쪽.)
7. 전한촌이 자신의 시에서 밝힌 자신의 상황과 이윤희의 도일 과정 및 일본에서의 행적이 일치 한다. 이윤희는 충남 대덕군의 진잠소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실업보수학교를 2년 중퇴했다. (이재면, 「이윤희의 독립유공자 평생 이력서」, 이윤희의 장남 李在勉 작성, 2007)그는 1922년, 1923년 농민운동을 하다가 도일했으나 이미 1921년 일본에서 흑도회 활동도 전개하였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결정문」, 2007, 6쪽, 7쪽.) 도일한 뒤 그는 아나키즘을 통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문예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이윤희가 1921년 11월 결성된 흑도회의 일원이라는 기록(朝鮮總督府警務局, 『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昭和五年 (1930년), 118쪽.)에도 불구하고, 1923년 3월 3일 가수원 3회 농부대회에서 그가 선언서를 낭독하고(《동아일보》1923년 3월 7일자 .)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것으로 볼 때(《동아일보》1923년 3월 15일자.), 도일 시기는 1923년 4월 이후일 것이므로 흑도회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편』, 지식산업사, 2015, 70쪽.) 그리고 자료상 서로 달리 명시되어 있고 이름이 거론되어 있지만 참가 여부가 불분명하므로, 흑도회에 입회하지 않는 것으로 정리하는 입장도 있다.( 김명섭,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일본에서의 투쟁』,이학사, 2008, 100쪽, 328쪽, 329쪽.)
8. 이윤희와 전한촌은 1928년 1월 15일 결성된 흑우연맹의 주요 회원으로서 활동했다. (김명섭,『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일본에서의 투쟁』,이학사, 2008, 334쪽.)전한촌의 시 ‘추억’의 내용 중에, “나의 형제 나의 벗이 놈들의 칼 총 끝에 생명을 잃은 날 9월 1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인가 드러나지 않지만(박태일, 『한국 지역문학 연구』, 소명출판, 2019, 1170쪽, 1171쪽.),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당시 동포들이 학살당한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윤희와 전한촌의 공통점에 대하여-전한촌이 이윤희의 또 다른 필명이라고 판단하는 근거
‘전한촌(全寒村)’은 시집 ‘무궤열차’를 1934년 8월 1일 동경에서 간행하였다. (박태일, 『한국 지역문학 연구』, 소명출판, 2019, 1157쪽, 1162쪽, 1167쪽.) 시집 ‘무궤열차’의 저자인 아나키스트 전한촌은, 지금까지 학계나 아나키즘운동 진영에서조차 그의 실체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조선무정부주의운동사 편찬위원회,『한국아나키즘운동사[전편]』, 형설출판사, 1994(2쇄), 406쪽, 423쪽; 김명섭,『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일본에서의 투쟁』,이학사, 2008, 376쪽.) 그러나 김영천 한국자주인연맹 의장은 2018년 9월 10일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태일 교수와의 왕복 이메일에서, 전한촌과 이윤희가 동일 인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윤희의 이력과 전한촌의 활동 사항을 이으면 한 인물의 종합적인 생애가 조명된다. 즉 그는 전한촌이 이윤희의 또 다른 필명이라고 판단하는데, 제시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이윤희와 전한촌은 여타 아나키스트보다도, 노동운동 외에 특별히 농민 및 농촌청년운동까지 전개한 점에서 공통된다.
2. 이윤희와 전한촌은 높은 수준의 에스페란티스트로서 공통점이 있다. 아나키스트의 에스페란토어 습득이 특이한 사항은 아니지만, 이윤희는 당대 최고 수준의 에스페란토어를 구사했으며 전한촌은 시집의 제목에 에스페란토어를 기입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이전,「유림 선생의 일상적인 위풍」,『아나키즘 학술대회, 단주 유림의 사상과 독립노농당』,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2005, 189쪽; 박태일,『한국 지역문학 연구』, 소명출판, 2019, 1157쪽.)
3. 이윤희의 소설 및 팜플렛 발간 시기와 전한촌의 시 및 팜플렛 발간 시기가 비슷하다.
이윤희의 검거, 투옥으로 출판에 지장이 있었기 때문에 ‘이 네스토르’나 ‘전한촌’으로 별개의 필명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이윤희가 ‘이 네스토르’라는 필명을 사용했음은 이미 알려져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결정문」, 2007, 10쪽.)
4. 러시아 농민운동의 지도자 ‘네스토르 마흐노’ 와 ‘全寒村’이라는 춥고 궁벽한 촌락의 이미지는, ‘농촌’과 ‘농민’이라는 의미로 연결된다.
5. 1932년 9월 농촌청년사를 청산하여 재출발하자는 성명문 초안을 이윤희가 기안하였으며(김명섭,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일본에서의 투쟁』,이학사, 2008, 209쪽.), 전한촌은 1933년 9월 창간하여 이듬 해 7호까지 간행한 ‘토민’에서 농촌청년사와 농촌청년운동을 지지한다는 글을 발표했다.(조선무정부주의운동사 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전편〕』, 형설출판사, 1994(2쇄), 423쪽; 김명섭,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일본에서의 투쟁』,이학사, 2008, 192쪽.) 비슷한 시기에 농촌청년사와 농촌청년운동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아나키스트는 이윤희와 전한촌이다.
6. 이윤희와 전한촌은 양일동(梁一東)과 밀접한 연계가 있다. 조선자유노동자조합의 이윤희는 1932년 노동절대회 준비위원회에서 조선동흥노동동맹의 양일동과 더불어 활동했고(김명섭,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일본에서의 투쟁』,이학사, 2008, 215쪽.), 해방 후에도 이들은 독립노농당의 창당에 깊이 관여하여, 각각 독립노농당 충남 대전대덕연합당부 지구당 위원장과 중앙당 선전부장을 맡았다.(김영천,「단주 유림과 독립노농당」,『아나키즘 학술대회, 단주 유림의 사상과 독립노농당』,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2005, 58쪽, 118쪽,120쪽, 122쪽.) 또한 전한촌이 일경에게 피습 검거되고 원고도 압수당한 상태에서, 양일동은 그를 대신하여 이곳저곳에서 불완전하나마 원고를 모아 교정을 보고 시집 ‘무궤열차’를 간행하였다.(박태일, 『한국 지역문학 연구』, 소명출판, 2019, 1159쪽, 1160쪽.)
7. 전한촌이 자신의 시에서 밝힌 자신의 상황과 이윤희의 도일 과정 및 일본에서의 행적이 일치 한다. 이윤희는 충남 대덕군의 진잠소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실업보수학교를 2년 중퇴했다. (이재면, 「이윤희의 독립유공자 평생 이력서」, 이윤희의 장남 李在勉 작성, 2007)그는 1922년, 1923년 농민운동을 하다가 도일했으나 이미 1921년 일본에서 흑도회 활동도 전개하였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결정문」, 2007, 6쪽, 7쪽.) 도일한 뒤 그는 아나키즘을 통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문예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이윤희가 1921년 11월 결성된 흑도회의 일원이라는 기록(朝鮮總督府警務局, 『朝鮮高等警察關係年表』, 昭和五年 (1930년), 118쪽.)에도 불구하고, 1923년 3월 3일 가수원 3회 농부대회에서 그가 선언서를 낭독하고(《동아일보》1923년 3월 7일자 .)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것으로 볼 때(《동아일보》1923년 3월 15일자.), 도일 시기는 1923년 4월 이후일 것이므로 흑도회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편』, 지식산업사, 2015, 70쪽.) 그리고 자료상 서로 달리 명시되어 있고 이름이 거론되어 있지만 참가 여부가 불분명하므로, 흑도회에 입회하지 않는 것으로 정리하는 입장도 있다.( 김명섭,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일본에서의 투쟁』,이학사, 2008, 100쪽, 328쪽, 329쪽.)
8. 이윤희와 전한촌은 1928년 1월 15일 결성된 흑우연맹의 주요 회원으로서 활동했다. (김명섭,『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일본에서의 투쟁』,이학사, 2008, 334쪽.)전한촌의 시 ‘추억’의 내용 중에, “나의 형제 나의 벗이 놈들의 칼 총 끝에 생명을 잃은 날 9월 1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인가 드러나지 않지만(박태일, 『한국 지역문학 연구』, 소명출판, 2019, 1170쪽, 1171쪽.),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당시 동포들이 학살당한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여겨진다.